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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인] <인터뷰> 도전할 때 빛이 나는 아트테이너, 황재근

작성자 : 커리어셀 작성일 : 2018-09-13 조회수 : 732

다른 수식어 없이 황재근하면 단 한사람이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개성이라는 것은 자존심과 같은 문제다. 황재근, 현재 그의 앞에 붙는 수식어는 많다. 
복면가왕 가면 디자이너, 프런코 올스타 우승, 앤트워프 왕립학교 등. 하지만 그는 황재근 이름 석 자로 기억되길 바란다. 
황재근다움은 뭘까?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인터뷰 첫 만남에서의 액세서리, 코디하며 인터뷰 내내 이어진 그만의 특유의 말투, 눈빛, 마지막 친필 사인까지 그만의 개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성 넘치게 온 몸으로 황재근을 발산하고 있는 존재. 
디자인은 물론 방송, 강연, 라디오 등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활동 분야를 넓히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도예과에서 창작의 자유 만끽, 손끝의 예민함 얻어
사실 황재근은 처음부터 패션디자이너가 목표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지금 모습과는 다르게 어렸을 때의 그는 내성적이고 말도 없는 아이였다고 한다. 
화가가 되고 싶어서 장래희망 란에 화가로 적곤 했다. 
자유롭고 독창적인 캐릭터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고등학교 때 남들처럼 내신을 보고, 수능을 보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지만 그에 따르면 초, 중, 고 지각 결석 하나 없었다고. 
이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러다 입시 미술을 했을 당시 도예과 출신이었던 학원 선생님의 권유로 도예과를 진학하게 되었으나 처음에는 크게 관심이 있진 않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봤을 때 잘한 결정이었다. ‘대개 도예과는 물레와 같은 성형작업이나 캐스팅 등 특정 분야로 쏠려 있다. 
하지만 홍익대는 도예에서도 A와 B로 분야가 나뉘어져 있고 공예보다 순수미술적인 측면이 강했는데 그게 나에게 맞았다. 
그 때문에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흙 말고도 많았다.’ 
특히 패션디자인과의 연관성에 대해 ‘흙을 다루면서 손의 감각이 예민해졌는데 의상을 할 때 이 부분이 도움이 많이 됐다.’ 
흙은 원단보다 훨씬 민감하기 때문에 두께, 모양 등 마무리하는 수준이 옷보다 더 높다. 
그 완성도의 감각이 손에 남아 있어 유학 당시에도 의상을 수작업할 때 다른 학생들보다 완성도가 훨씬 높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너는 옷을 조각하는 것처럼 만든다’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예과의 기나긴 작업 과정과 소성 과정에서의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자신과 잘 맞지 않다고 느꼈다고. 
그에 말에 따르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패션이 나에게 다가왔다’고 한다. 
‘어머니께서 예전에 패션 디자인을 하셨기 때문에 집에 항상 옷 만드는 재료가 있었다. 
그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심코 지나쳐왔던 것들 속에 패션이 다 숨어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이다. 
그때 저게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싶었다.’ 
그는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대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둘까 상담도 했지만 교수님은 그를 붙잡았다. 
대신 그에게 전공의 제약에서 벗어나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대학교 3, 4학년이 학교 인생 중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스폰지처럼 모든 것을 흡수했던 황금기 같은 시기였다’라며 ‘패션은 의식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산업디자인, 섬유디자인 등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고 덧붙였다. 
‘그때부터 도예의 개념을 넓힌다는 슬로건으로 창작의 자유를 만끽했다. 
3학년 때부터 옷을 만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한 번은 내가 만든 비닐 옷 안에 수증기가 맺히는 것에 영감을 받아 작품으로 제작하고자 했다. 
나를 소성한다는 콘셉트로 가마에 들어갔는데 다른 수업 교수님이 그 모습을 보고 호통을 치셨다.(웃음)’ 
그 사건과 더불어 졸업 작품도 고전 명화를 패러디한 자신의 누드사진을 전시하는 등 학부 때부터 황재근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첫 번째 인생의 전환점, 앤트워프 왕립학교


그를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앤트워프 왕립학교 한국인 최초 졸업이라는 말이다.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이렇게 강조되는 것일까? 
실제로 이 학교는 졸업하기가 굉장히 어려워 작년 기준으로 한국인 졸업생도 손가락에 꼽는다고 한다. 1학년 때 5-60명이던 학생이 졸업할 때면 10명 내외가 된다. 
얼마나 살벌하고 치열한지 그가 참여했던 ‘프로젝트 런웨이’를 기준으로 물어보니 난이도가 훨씬 높단다. 
가장 어려웠던 점에 대해 ‘나 자신도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도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하는 게 힘들었다. 
당시에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나만의 엄청난 것을 하고 싶다는 것에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그 기대치에 맞는 합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 힘들었다. 거기 있는 대부분의 학생이 그럴 수밖에 없다. 
살아남으려면 그렇게 하게 되는 거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패션에 대한 것과 자신의 개성을 더욱 뚜렷이 만들 수 있었다. 
개성, 아방가르드, 실험성, 그것이 그가 이 학교를 선택한 이유였다. 세계 3대 패션 스쿨로는 세인트마틴, 파슨스, 앤트워프가 있다. 
그에 따르면 ‘앤드워프는 가장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성과 개성이 가장 중요하고 파슨스는 대중적이고 상업성이 베이스다. 
세인트는 중간에서 약간 진보적인 패션에 가깝다. 
하지만 그러면서 영국학교가 공통으로 가지는 클래식한 베이스가 있다’라고 각 학교의 특징에 관해 설명했다. 

그 때문에 앤트워프 왕립학교 진학을 꿈꾸는 이도 많아졌을 터. 
이에 ‘예전보다 등록금이 올랐지만 상대적으로 물가나 등록금이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여전히 저렴하긴 하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앤트워프를 가는 것은 반대한다. 실험, 개성, 진보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돈에 연연해서 오는 것 자체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유학이 베스트는 아니다. 자기 스타일에 따라 다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스타일의 영역인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 같은 경우에도 상업적인 디자이너보다는 아티스틱하고 독특한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고 국내에서는 나와 맞는 학교가 없어서 유학을 간 것이다. 
상업적인 재능이 있었다면 한국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자기의 영역을 잘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학교가 해외에 있다면 유학의 반절은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간판을 따기 위해서 가는 것이라면 100% 실패한다.’고 답했다. 

▶원하는 것을 할 때 성공하고, 즐겁고, 돋보이는 길보여
그는 ‘프로젝트 런웨이 올스타’에서 우승한 후 ‘제쿤(ZÊ QUUN)’을 론칭했다. 
그 뒤 대중적인 라인으로 ‘쿠니’가 나왔었고 올해 9월에는 ‘베스티티’가 GS홈쇼핑에서 론칭했다. 
그래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여전히 제쿤이다. ‘제쿤 브랜드는 현재는 휴면기인데 아직 구체적 계획은 없다. 
브랜드를 활발하게 하려면 다른 활동을 다 접어야 하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하게 된다면 프로젝트성으로 콜라보나 아니면 특정 아이템만이라든지, 전시형태라든지 기존의 런웨이가 아닌 다른 형태로 가고 싶다. 
조금 더 황재근의 독특한 부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줄 만한 독특한 형태로 하고 싶다’고 제쿤 브랜드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리파인 아방가르드(Refine Avant-garde) 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을 만들기까지도 굉장히 오래 걸렸다고. 
그 단어를 만든 과정에 대해 ‘처음에는 가능한 한 많이 집어넣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없진 않지만 정제하게 된다. 
아방가르드 하면 공예에 가까운, 취미에 가까운, 포스트모더니즘을 베이스에 둔 해체 재조립에만 생각하는데 나의 아방가르드란 질감과 광택을 강조한 화려함이 특징이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황재근씨의 아방가르드는 굉장히 블링블링하네요’ 라고 하더라.(웃음)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그 화려한 것을 배제하게 되기도 했다. 
그것을 보니 리파인(refine:정제)한다는 말이 잘 맞는다 생각해서 리파인 아방가드르라고 붙이게 됐다. 
전형적인 화려함 보다는 유럽적인 것, 해체가 뒤섞여 오묘하지만 이게 황재근 스타일이다’


수공예적인 모습은 그의 디자인의 특징 중 하나다. 
이는 상업적이고 대량생산되는 것보다는 제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독특한 디자인을 하고 싶은 그의 소신과도 맞닿아있다. 
하지만 결국 자금을 모은 후에 브랜드를 ‘유지’할 때 생계 문제가 걸릴 텐데,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제쿤을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는게 재밌다.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여러 곳에서 콜라보레이션 제의가 들어온다. 
콜라보만 하다 죽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상업적인 면이 없어 사업이 잘 안 될 때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복면가왕을 만났다. 
나의 개성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그것이 무기가 됐다. 여기에 라이프 트렌드의 변화도 한몫했다. 
트렌드나 문화가 개인에 맞춰지면서 라이프스타일이 큰 것에서 점점 작은 것으로 잘게 나누어졌다. 
취향과 문화의 척도가 너무도 다양해진 것이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도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었다.’ 
이어 ‘그렇다고 상업적인 것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창의적인 것을 할 때 성공하고, 즐겁고, 돋보일 수 있다.’라고 말을 이었다. 

▶아트테이너로서의 황재근
그는 복면가왕 가면 디자인을 인생의 2번째 터닝포인트라고 말한다. 
사실 그 이전에는 방송 소품 제작은 패션 디자인의 하위 영역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복면가왕에서 가면은 너무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방송소품 제작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생계를 위해서 시작했지만 가면 만드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상업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고 쓰는 사람과 무대, 재미, 멋을 어우르면 되는 건데 이 모든 게 내가 잘하는 요소들이었다.’


‘초창기에 제작진과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제작진은 머릿속에 있는 것을 말로 하면 디자인해주는 것을 바랐다. 
그런데 내가 아이디어 제안을 하니까 처음에는 제작진이 당황스러워했다. 
서로의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제작진도 방송 소품이나 가면의 콘셉트를 보는 관점을 넓힐 수 있었다. 
나는 아티스트로서 대중적인 취향이 무엇인지 찾을 수 있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나 혼자 산다’,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등 진행에서부터 패널까지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만 해도 열손가락이 부족하다. 방송 프로그램 속 황재근은 아티스트적인 면모뿐 아니라 엔터테이너적인 면모를 보이며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모습을 보면 아트테이너(아티스트+엔터테이너)라는 말이 떠오른다. 
여러 방송 중에서 가장 잘 맞았던 프로그램을 묻자 ‘마이리틀텔레비전’을 꼽았다. ‘혼자 하는 방송이다 보니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이 재밌었다. 방송 형식도 혁신적이었고 나를 알리는 데도 많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복면가왕만큼이나 의미가 있다. 복면가왕은 디자이너로서 마리텔은 방송인으로서 황재근을 알린 계기가 된 것이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라이프 스타일 디자인이다. 지금 하는 다양한 활동도 어찌 보면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자양분 같은 것이다. 
‘수많은 타과 전공을 들었던 것이 지금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종합해볼 때 어떤 디자인으로 말해야 할지 묶어보니 그게 라이프였다.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게 대단한 게 아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는 게 라이프 스타일인 것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겪은 경험을 살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디자인하고 싶다. 지나가는 모든 곳에 황재근이 디자인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전이란 매일 먹는 밥과 같은 것 
2013 프런코 올스타, 유러피안 패션 어워드 2006 in Italy 1위 수상 등 황재근은 도전할 때 빛이 난다. 
더불어 브랜드 론칭하면서 빚더미에 앉은 시절, 구두쇠로 살 수밖에 없었던 유학시절 등 숱한 시련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실제로 그는 힘든 시기마다 버틸 수 있던 원동력이 목표와 희망이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예전보다 살기는 편해졌지만 여전히 또 다른 황재근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한다. 새로운 것이 오면 피곤하다가도 갑자기 생기가 도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에게 도전이란 날마다 밥 먹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도전 없이 살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도전은 하게 되면 편안함 속에서 그 새로움이 불편하게 될 줄 알면서도 반짝반짝 빛날 결과 하나만을 보고 감수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도전은 직감적으로 내 손으로 시작해서 내 손으로 끝내야 하는 일이라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럼 무조건 도전한다.’


그는 5, 10년 뒤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냐는 질문에 ‘굳이 수식어가 있어야 할까. 그냥 황재근이면 되지 않나. 
황재근이라는 이름이 있는 게 중요하다’라고 답했다. 그래서인지 예술가 중에서 누군가와 닮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나와 정반대의 삶이나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을 존경을 하게 된다. 그래서 김연아도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도전할 수 없는 분야지만 아름다운 무대를 위해 힘든 과정을 인내하는 그녀의 모습에 희망을 얻는다. 
나중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은 전혀 할 수 없는 발레리노,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도전을 머뭇거리는 예비 디자이너에게 그는 이렇게 전했다. ‘도전 의식이 있어야 할 사람이 있고 없어야 할 사람이 있다. 
나름의 도전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도전이라는 단어는 디자인을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요건이다. 
예술대학 자체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도전이지 않나’라며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다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의 카테고리를 나눠 두 개 엮이면 그게 해야 할 일이고 세 개가 겹치면 성공, 하나만 겹치면 한 번 더 생각해봐야한다. 이것을 알려면 자기를 단절시키면 안 되고 시야의 폭을 넓혀 자신의 취향, 선호도, 관심의 정도를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