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전 무승부로 벤투호는 숙제를 안았다. 하지만 대표팀을 둘러싼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누적된 숙제를 상당히 해소했다.
9월 A매치 2연전에 이어 10월 A매치 2연전도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6만4천 석이 넘는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우루과이전은 대표팀을 향한 뜨거운 열기를 증명한 하이라이트였다. 단지 2-1로 승리해서가 아니었다. 경기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관중석과 거기에 다시 호응하는 선수들 간의 선순환이 반가웠다.
이제 팬들에게 A매치는 가고 싶어도 가기 힘든, 희소성 높은 콘텐츠가 됐다. 인기의 척도라는 티켓팅부터가 전쟁이다. 경기 당일에나 중계 정보를 알기 위한 검색 때문에 실검에 등장하던 A매치 관련 키워드들이 2주 전부터 등장하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브라질 대표팀 방한 경기 같은, 20년에 한 번 정도 돌아오는 이벤트가 촉발한 게 아니라 이렇게 대표팀을 향한 순수한 관심과 열기가 장기간 지속된 적은 많지 않다. 1998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2002 한일월드컵을 전후한 시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한동안 A매치를 향한 시선과 분위기는 냉랭했다. 표가 생겨도 굳이 경기장을 찾는 수고를 하며 볼 정도로 대우받는 콘텐츠와 소비 대상이 아니었다. 러시아월드컵 직전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주였다. 그런데 4개월 사이 상황이 극적인 반전을 맞았다.
대표팀의 경기력 수준이 극적으로 올라갔을 리는 없다. 선수 구성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변한 건 소비자, 팬덤의 인식이다. 대표팀과 A매치의 인기는 정서적 동화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 지식과 정보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감정이 닮아야 한다. 대표팀과 팬들 사이에 큰 간격이 벌어졌던 것은 양자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1경기 결과와 월드컵 같은 큰 대회의 성적에 팬심은 요동친다. 그런데 꼭 실패했다고 대표팀이 손가락질만 받는 것은 아니다. 대표팀의 경기력은 세계 정상과는 거리가 멀다. FIFA랭킹 5위의 우루과이를 꺾는가 하면 불과 나흘 뒤에는 오히려 FIFA랭킹이 낮고 6연패 중이던 파나마에 후반 주도권을 내주며 힘겨운 무승부를 기록하는 데서도 볼 수 있었다.
정말 중요한 건 팬들이 지켜보는 과정이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패한다면 그것 또한 수용할 수 있는 게 스포츠를 소비하는 팬심이다. 패배는 불량품이 아니라 다음 승리를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들이 그 과정이 아닌 결과만 보고 호응한다는 착각이 대표팀, 그리고 대한축구협회를 위기로 몰아넣은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행동 하나, 말 하나가 더 큰 실망과 오해를 불렀다. 팬들의 의문과 지적에 ‘침묵이 최선’이라고 하다가 적폐로 몰리며 위기를 자초했다.
A매치를 향한 흐름이 바뀐 것은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아니다. 그 전에 파울루 벤투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김판곤 선임위원장으로 대표되는 대한축구협회가 보여준 진정성과 공정성이 출발이었다. ‘다시 신뢰해도 괜찮을까?’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또 다른 열린 과정을 통해 선임된 김학범 감독이 막연한 의구심을 뒤집고 금메달을 따며 팬들을 본격적으로 확신하게 됐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10대, 그리고 여성 팬층이 새로 유입된 것은 확실히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지만 그것이 폭발력일 지니게 된 건 기저에 깔려야 하는 든든한 팬층의 신뢰를 회복하면서다. 상업적인 의미에서만 지금 대표팀을 향한 봄날을 해석할 게 아니라 대표팀의 인기를 둘러싼 기본적인 구조와 전제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다. 신규 팬심에 집중하다가 다시 그 기본을 잃으면 대표팀에 대한 인기는 주춧돌부터 흔들릴 수 있다.
팬들이 돌아오고, 대표팀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돌아왔다. 선수도 사람이다. 충만한 애국심만으로 대표팀의 무게를 다 감당할 수 없다. 대표팀 인기가 떨어지고 비판의 빈도가 잦아지면 부담을 느낀다. ‘대표팀은 영광된 자리’지만 ‘와서 욕만 먹고 가는’ 상황에선 책임감과 의무감이 온전할 수 없다.
대표팀을 신뢰하면 시선과 사고도 관대해진다. 실수와 실패에 대해 소위 말하는 ‘까방권’을 얻을 수 있다. 파나마전은 분명 패배에 버금간, 나쁜 흐름의 경기였지만 팬들은 선수들이 경기 후 말한 좋은 경험, 예방 주사 같은 생각에 동의했다. 비판받을 실수를 의식해서 소극적인 플레이를 하다가 더 나쁜 경기를 하는 악순환은 9, 10월의 A매치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짧은 소집 기간에 두 차례 경기를 비롯해 많은 것을 준비하는 대표팀 내부 과정도 좋아지고 있다. 지난 9월에 이어 이번 10월 소집에서도 선수들은 벤투 감독과 함께 하는 과정을 결과 이상으로 더 높이 평가했다. 9월에는 감독 교체로 인한 신기루를 경계했던 기성용도 이번에는 “확실히 디테일하다. 선수들이 감독님 의도를 따라가려 노력하며 팀이 좋아지는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우루과이전과 파나마전에서의 좋은 장면은 대부분 훈련에서 준비된 장면이었다. 세트피스 훈련에 대한 높은 비중, 깊숙한 측면 침투와 과거 대표팀에서 보기 힘들었던 컷인 플레이에 의한 득점, 수비에서의 빌드업 등이 그랬다. 현재 가장 높은 수준의 훈련 프로그램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손흥민은 “경기장에서 나오는 모습은 결국 훈련 때 쏟은 노력이다. 이게 맞는 방향이다”라고 지지했다.
파나마전의 경우 압도적이었던 전반 35분 이후부터 의도치 않았던 흐름으로 갔지만 벤투 감독의 말대로 축구는 그럴 수 있다. 기록이라는 절대 비교로 우위를 가리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이다. 90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거기까지 도달하는 더 긴 시간의 훈련, 미팅, 생활에서 벤투 감독이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설득력이다. 전임 대표팀 감독들은 그 부분에서 선수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지 못한 게 사실이다. 선수들이 대표팀에 오기 두려웠던 정확한 이유는 자신들이 경험하는 과정이 부실해, 팬들이 비판할 실패로 이어질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수들은 이제 대표팀에 오는 것이 두렵지 않다. 몸은 피곤하지만, 그 이상의 보람이 있어 즐겁다는 손흥민의 말은 거짓이 아니다. 대표팀 내부에서 경험한 것들은 선수들에 의해 대표팀 밖에 있는 선수들에게 퍼진다. 다시 대표팀에 오고 싶은, 새롭게 대표팀에 오고 싶은 선수들의 노력이 K리그를 비롯한 한국 축구의 전방위적 분발을 유도할 것이다. 그 노력을 증명해 대표팀에 온 선수들은 양질의 훈련을 통해 경기를 준비하고, 경기장 안에서 증명할 것이다.
‘보고 싶은 A매치와 오고 싶은 대표팀’은 그렇게 한국 축구에 긍정적 순환을 일으키는 중이다.
글=서호정
사진=대한축구협회